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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독립운동가3_여성 엽서 (2019)
Independence Activists 3: Women Postcards (2019)
한국어
독립운동가3 여성 엽서세트는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에 나선 13명의 여성 독립운동가들을 소개하는 자료다. 1919년 3.1운동에 인구의 10분의 1이 참여했던 역사와 함께, 독도가 일본 제국주의 침탈의 첫 희생지였다는 사실을 짚으며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조명한다.
EnglishThis postcard set, "Independence Activists 3: Women," introduces 13 women who fought for Korea's independence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Period (Anti-Japanese Resistance Period). It highlights their lives alongside two historical facts: that one in ten Koreans took part in the March First Movement in 1919, and that Dokdo was the first place to suffer from Japanese imperialist aggression.
자료 원고 · 한국어
◎ 독립운동가의 심장 독도 Dokdo, heart of freedom fighters
독도에서 통일까지 100% 완전한 대한민국을 향해 나아가라!
독도는 일본제국주의 한반도 침탈의 첫 번째 희생물이었습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전쟁 수행 중에 독도를 일본영토로 강제 편입하였고,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한반도를 강제로 식민지배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동안 한반도의 자원은 철저하게 수탈당했고, 한국인들은 군인과 노동자로 강제 동원되었으며, 한국의 소녀들은 일본군의 성노예로 전쟁터에 끌려갔습니다. 한국인들은 한국의 말과 글을 사용할 수 없었고, 자신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꿔야했으며, 강제로 일왕 숭배 의식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919년 3·1운동에는 당시 인구의 십 분의 일이나 되는 200만 명의 한국인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광복을 맞을 때까지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독립운동에는 많은 여성들도 참여했습니다. 전통 사회 속에서 억압받던 여성들은 교육을 통해 여성과 민족에 대해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고, 민족의한 구성원으로서 당당히 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어느 독립운동 가의 어머니, 아내, 누이였기에 이들의 활동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독립의 꿈을 향해 헌신된 삶을 살았던 여성독립운동가, 그들이 꿈꾼 대한민국을 생각해봅니다.
1945년 한국의 위대한 독립운동가들은 세계인과 하나 되어 일본제국주의로부터 자유와 평화를 되찾 았습니다. 독도는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부활하는 일본제국주의를 막아내고, 인류 보편의 정의와 평화를 수호해 나가는 21세기 독립운동가의 사명을 되새기게 합니다.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는 한국의 청년들과 함께 21세기 독립운동가가 되어 이 위대한 꿈을 성취해 나갈 것입니다!
독도의 꿈을 세계 친구들에게 알려주세요! _ kkum.prkorea.com
◎ 김란사 | Kim Ran-sa | 1872~1919
꺼진 등불에 불을 밝혀라! Light up the extinguished torch!
“(윤치호의 글을) 조심스럽게 정독해 보니 그가 슬프게도 정보를 잘못 알고 있거나 맹목적인 편견을 갖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학당 졸업생들이 요리할 줄 모른다고 해서 비난 받아서는 안 되며, 옷감 재단, 바느질, 빨래, 다림질을 모르는 것에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된다……필자는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요리와 바느질을 잘 하려고 학교에 다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교육가이자 독립운동가인 김란사는 1911년 12월 영문선교잡지 ‘더 코리아 미션 필드(The Korea Mission Field)’에 ‘항의(A Protest)’라는 제목으로 위의 글을 기고했습니다. 당시 개화파 정치인이었던 윤치호가 학당에 다니는 여성들은 요리, 바느질을 할 줄 모른다고 비판하자 김란사는 기고를 통해 그의 의견을 비판한 것입니다. 김란사가 당시 유명 남성 정치인과 벌였던 이 논쟁은 매우 파격적인 사건이 었습니다.
여성독립운동가 김란사는 1906년 한국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은 지식인 입니다. 기혼자였지만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공부하였고 더 큰 배움을 위해 어려운 유학 길에 올라 일본과 미국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리고 귀국 후에는 모교인 이화학당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자신의 지식을 바쳐 이 땅의 여성과 민족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여성독립운동가 유관순도 김란사가 지도했던 학생자치단체인 ‘이문회’에서 활동하면서 독립의식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1910년 국권을 빼앗긴 뒤에 김란사는 더욱 독립운동에 매진하였고, 1919년 파리강화회의의 밀사로 파견되어 가던 중 중국에서 갑작스런 병을 얻어 생을 마감했습니다. 여성독립운동가 김란사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꺼진 등불에 불을 밝혀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의 신념에 따라 억압받은 이 땅의 여성과 민족에 불을 밝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여성독립운동가 김란사의 꿈이 우리의 독립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독립운동가 김란사가 되어 그녀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주세요!
김란사의 꿈을 세계 친구들에게 알려주세요! _ kkum.prkorea.com
◎ 김향화 | Kim Hyang-hwa | 1897~미상
대한 독립 만세! Long live Korean independence!
1919년 1월 27일 고종의 승하 소식을 들은 수원예기조합 소속의 기생 김향화는 20여 명의 동료 기생 들과 함께 수원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소복을 입고 나무 비녀를 꽂은 이들은 대한문에 도착해 다른 백성들과 함께 엎드려 곡을 했습니다. 사회적으로 가장 멸시받던 기생들이었지만 이들 역시 일제에 나라를 잃은 대한의 백성이었습니다.
김향화는 수원에서 기생들의 만세운동을 이끈 여성독립운동가입니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주요 지역에서 3·1만세운동이 거세게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수원에서도 3월 16일 만세운 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김향화는 선배 기생인 서도홍을 찾아가 만세시위를 함께 결의하고 수원지역의 기생 30여 명을 모았습니다. 이들은 거사일을 3월 29일로 정하고 태극기를 만들고 준비를 했습니다. 29일은 수원 기생들이 화성행궁의 봉수당에 세워진 자혜병원으로 성병검사를 받으러 가는 날이었습 니다. 당시 검사는 진료실도 아닌 병원 마당에 칸막이를 설치하고 매우 강압적이고 비인간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거사일 오전 11시 30분경 김향화와 기생들은 자혜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병원 앞에 다다르자 이들은 치마폭에 숨겨두었던 태극기를 꺼내 들고 만세를 외쳤습니다. 김향화가 먼저 만세를 외치자 다른 기생들도 일제히 만세를 외쳤습니다. 일본 경찰들은 총과 칼을 들고 위협했지만 이들은 계속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도 만세운동에 동참했습니다. 김향화는 2개월간 감금되어 고문을 당하 였고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최대 항일 운동인 3·1운동에는 수원을 비롯한 안성, 진주, 해주, 통영 지역의 기생들도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이들 중 14명은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습니다. 사회적으로 가장 천시 받았던 기생들이었지만 일제의 무자비한 총칼 앞에 당당히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여성독립운동가 김향화의 꿈이 우리의 독립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독립운동가 김향화가 되어 그녀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주세요!
김향화의 꿈을 세계 친구들에게 알려주세요! _ kkum.prkorea.com
◎ 남자현 | Nam Ja-hyun | 1872~1933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
1933년 봄, 중국 하얼빈 교외 지역에서 61살의 한 노파가 급습한 일경에게 체포되었습니다. 몸을 수색 해보니 그녀는 피 묻은 의병 군복을 옷 속에 껴입고 있었고 권총과 폭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여자 안중근’이라고 불리는 무장 독립운동가 남자현입니다.
남자현은 어떻게 여성의 몸으로 무장 독립운동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녀가 처음부터 비범한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닙니다. 남자현은 1872년 경북 안동 양반가에서 태어나 19살에 혼인하여 평범한 여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1896년 의병에 가담한 남편이 전사하면서 그녀의 인생은 크게 바뀌었습니 다. 그녀는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지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부친이 의병 부대를 조직하자 의병을 모집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활동을 도왔고, 1919년에는 3·1운동에 가담해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아들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해 서로군정서에 가입에 무장독립운동에 참여했습니다. 남자현은 여성의 몸으로 일본의 요인을 처단하는 2번의 거사를 계획하였고, 무토 노부요 시를 처단하는 두 번째 계획을 실행하던 중 일경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체포 당시 그녀는 남편이 전사할 때 입었던 의병 군복을 입고 있었고, 무토를 처단할 권총과 폭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자현을 여자 안중근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1932년 하얼빈에 국제조사단이 파견되자 남자현은 한국의 강력한 독립의지를 전달하고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고 이를 조사단에 보냈습니다. 여성의 몸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독립의지를 전달하고 권총과 폭탄을 가지고 일본 요인의 처단 계획을 실행했던 남자현. 그녀는 독립은 정신으로 이룬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이 누구보다 강인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오늘은 왼쪽 무명지 두 마디와 이별하려고 한다. 어쩌면 내 손을 채웠던 이 작은 것이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수도 있겠다 싶구나.”
여성독립운동가 남자현의 꿈이 우리의 독립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독립운동가 남자현이 되어 그녀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주세요!
남자현의 꿈을 세계 친구들에게 알려주세요! _ kkum.prkorea.com
◎ 박차정 | Park Cha-jeong | 1910-1944
여성과 민족의 완전한 해방을 위하여 싸우라!
부산 금정구에 있는 문화회관 앞에는 한 여성의 동상이 있습니다. 군복을 입고 장총을 든 여성은 곧전투에 임할 거 같습니다. 이 동상의 주인공은 중국에서 무장독립운동을 했던 여성독립운동가 박차 정입니다.
여성독립운동가 박차정은 한일합병이 된 1910년에 태어났습니다. 민족의식이 강한 집안에서 자라났고 부산지역의 3·1운동을 주도했던 일신여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일신여학교 재학 중에는 일제에 항거하는 동맹휴학을 주도하였으며 졸업 후에는 항일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에서 간부로 활동했습니 다. 그리고 1930년 1월에 서울 시내 여학생들이 대거 참여한 만세운동의 배후세력으로 지목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후 그녀는 국내 활동이 어려워지자 의열단 활동을 하는 오빠의 도움으로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평생의 동지이자 반려자인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박차정은 김원봉을 도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개설을 준비하였고 학교가 개교한 뒤에는 여자부 교관으로 활동했습니다. 또한 민족혁명당 산하기관인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하여 활동하였으며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의 단장으로 1939년 강서성 곤륜산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총상을 입고 그 후유 증으로 1944년에 서거했습니다. 무장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민족과 여성의 완전한 해방을 위하여 여성독립운동가 박차정은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우리 조선 부녀를 현재 봉건적 노예제도 하에 속박하고 있는 것도 일본제국주의이고, 또 우리를 민족적으로 박해하고 있는 것도 일본제국주의이다. 우리들이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부녀는 봉건제도의 속박 식민지적 박해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 또 일본제국주의가 타도된다고 하더 라도 조선의 혁명이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방면에서 진정한 자유 평등의 혁명이 아니라면 우리 부녀는 철저한 해방을 얻지 못한다. -남경조선부녀회 선언문 중- ”
여성독립운동가 박차정의 꿈이 우리의 독립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독립운동가 박차정이 되어 그녀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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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춘화 | Bu Chun-hwa | 1908-1995
일제의 총과 칼이 무섭지 않다! 우리는 죽을 각오로 일어섰다!
1932년 1월 12일 제주도 세화리 장날에 300여 명의 제주 해녀들이 빗창과 호미를 들고 신임 제주 도사 다구치 데이키가 탄 차를 막아섰습니다. 다구치 데이키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해녀조합은 해녀 들이 채취한 해산물을 헐값에 강탈하고, 물질을 못하는 어린이와 할머니들한테도 조합비를 걷는 등부당한 수탈이 극심하여 해녀들이 직접 일제에 항거하여 일어선 것입니다.
부춘화는 이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이끈 여성독립운동가입니다. 그녀는 1908년 제주도 구좌읍 하도리 에서 태어나 15세부터 물질을 배웠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낮에는 바다에 나가 물질을 하고 저녁 에는 하도보통학교 야간부에 다니며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21세에 구좌면 해녀회장으로 뽑혀 활동하던 중 일제의 수탈에 맞서 항일운동을 이끌게 된 것입니다.
해녀들의 대규모 시위에 제주 도사는 해녀들의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일제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오히려 시위의 확산을 염려하여 해녀들을 가르쳤던 청년교사들을 시위 배후세력 으로 검거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500여 명의 해녀들은 세화리 순사주재소를 습격해 거세게 시위를 했습니다. 부춘화는 이때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고 6개월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부춘화가 이끌었던 제주해녀항일운동은 일제강점기 일제의 수탈에 맞서 사회적으로 가장 천시받고 연약했던 해녀들이 일으킨 항일운동입니다. 그러나 이는 국내 최대 여성항일운동으로 238회의 집회, 17,000여 명이 참여한 위대한 독립운동입니다.
여성독립운동가 부춘화의 꿈이 우리의 독립을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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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춘화의 꿈을 세계 친구들에게 알려주세요! _ kkum.prkorea.com
◎ 안경신 | Ahn Gyung-sin | 1888~미상
독립을 위하여 강력한 폭음과 함께 살고 죽으리라!
1920년 8월 3일 밤 9시 30분경 일본제국주의를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평안남도 도청에 폭탄이 투척되어 경찰서 담장이 무너지고 유리창이 부서졌으며 일본 경찰 2명이 사망했습니다.
이 거사는 광복군총영이 주도한 것으로 참여한 대원 중에는 몸집이 작은 한 여성이 포함되어 있었습 니다.
이 여성 대원은 여성독립운동가 안경신입니다. 안경신은 평안남도 출신으로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수료한 뒤 귀향하였다가 1919년 평양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후 여성독립운동단체인 대한애국부인회에서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활동을 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조직이 발각되어 중국으로 건너가 광복군총영에 가담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는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이 한반도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임시정부는 이를 세계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할 기회로 여기고 외교적 노력을 하는 한편 광복군총영을 통해 폭탄거 사를 계획했습니다. 광복군총영은 13명의 대원을 선발해 서울, 평양, 신의주 등으로 밀파했습니다. 이중 안경신이 속한 제2대만이 거사에 성공하였고 임무를 마친 대원들은 귀환 길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안경신은 동료들과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임신한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국내에 남아 피신하였 다가 아이를 출산한 직후에 일경에 체포되었습니다.
여성독립운동가 안경신은 무력 투쟁으로 일제를 물리치고자 했습니다. 그녀는 이 신념에 따라 임신한 몸으로 폭탄 거사에 참여하며 무장독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독립투쟁가가 많이 있고 여성투쟁가도 수없이 있다. 그러나 안경신 같이 시종일관 무력적 투쟁에 앞장서서 강력한 폭음과 함께 살고 죽겠다는 야멸찬 친구는 처음 보았다.” - 안경신의 동료 최매지
여성독립운동가 안경신의 꿈이 우리의 독립을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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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윤희 | Euh Yun-hee | 1881~1961
내 몸은 묶어 갈 망정내 마음은 못 묶어 가리라!
1919년 2월 개성지역에 독립선언서가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큰 위험이 따르는 독립선언서 배부에 선뜻 나서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을 전해들은 기독교 여성 전도사 어윤희는 자신이 독립선언 서를 배부하겠다고 자원했습니다. 그녀는 유치원 교사 권애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개성 지역의 주요인사들에게 배부했습니다. 그리고 호수돈여학교 사감인 신관빈과 함께 개성 지역의 만세운 동을 계획하여 독립선언서 2천부를 더 인쇄하여 호수돈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3월 3일 개성지역의 첫만세운동을 이끌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잡으러 온 일본 경찰들에게 “너희가 내 몸은 묶어 갈 망정내 마음은 못 묶어 가리라” 라며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어윤희는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녀가 투옥된 서대문형무소의 여옥사 8호 감방에는 개성 만세운동을 함께 이끈 권애라, 신관빈, 심영식을 비롯하여 수원에서 기생들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향화, 파주의 만세운동을 이끈 임명애, 그리고 유관순이 함께 수감되었 습니다. 어윤희는 옥중에서도 수감된 여성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항일운동을 계속 전개했습니다. 1919 년 12월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세를 부르고, 1920년 3월 1일에는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했습니다. 아무것도 어윤희와 여성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 여옥사 8호 감방의 노래> 전중이 일곱이 진흙색 일복 입고 두 무릎 꿇고 앉아 주님께 기도할 때접시 두개 콩밥덩이 창문 열고 던져줄 때 피눈물로 기도했네 피눈물로 기도했네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산천이 동하고 바다가 끓는다 에헤이 데헤이 에헤이 데헤이 대한이 살았다 대한이 살았다
여성독립운동가 어윤희의 꿈이 우리의 독립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독립운동가 어윤희가 되어 그녀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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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광심 | Oh Gwang-sim | 1910~1976
험난한 세파에 괴로움 많아도 광복을 위하여 끝까지 가리라!
<님 찾아가는 길> 비바람 세차고 눈보라 쌓여도 님 향한 굳은 마음은 변할 길 없어라 님 향한 굳은 마음은 변할 길 없어라 어두운 밤길에 준령을 넘으며 님 찾아 가는 이 길은 멀기만 하여라 님 참아 가는 이 길은 멀기만 하여라 험난한 세파에 괴로움 많아도 님 맞을 그날 위하여 끝까지 가리라 님 맞을 그날 위하여 끝까지 가리라
이 시는 여성독립운동가 오광심이 만주를 출발하여 남경의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여정 중에 지은 시입 니다. 그녀의 시에는 험난한 환경 속에서도 독립을 향하는 그녀의 확고한 결의가 느껴집니다.
1934년 5월 오광심과 그녀의 남편이자 동지인 김학규는 남경 임시정부를 향해 만주를 출발했습니다. 남만주 지역의 독립군인 조선혁명군의 대표로 남경 임시정부에 조선혁명군의 활동과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주에서 남경까지는 매우 먼 거리입니다. 더욱이 요소마다 있는 일제의 검문소를 통과해야 하는 매우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다행히 오광심과 김학규 두 독립운동가는 험난한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남경에 도착해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광심의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남경에서 작성한 김학규의 보고서를 만주에 전하고, 만주의 지령을 다시 남경 임시정부에 전하기 위해 한 번 더 남경과 만주를 오가는 임무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여성독립운동가 오광심은 1940년 9월 17일 중경 임시정부가 창설한 한국광복군의 여군으로서 출범식에 참석하였으며 이후로 1948년 남편 김학규와 귀국할 때까지 중경에서 서안, 산둥, 상해, 심양 지역 으로 옮겨 다니며 길고 험난한 독립운동의 여정을 묵묵히 걸었습니다.
여성독립운동가 오광심의 꿈이 우리의 독립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독립운동가 오광심이 되어 그녀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주세요!
오광심의 꿈을 세계 친구들에게 알려주세요! _ kkum.prkorea.com
◎ 윤희순 | Yoon Hee-sun | 1860~1935
우리 조선의 안사람들도 의병을 할 것이다!
우리나라 의병들은 나라찾기 힘쓰는데 우리들은 무얼할까 의병들을 도와주세 내집없는 의병대들 뒷바라질 하여보세 우리들도 뭉쳐지면 나라찾기 운동이요 왜놈들을 잡는거니 의복버선 손질하여 만져주세 의병들이 오시거든 따뜻하고 아늑하게 만져주세 우리조선 아낙네들 나라없이 어이살며 힘을모아 도와주세 만세만세 만만세요 우리의병 만세로다 - 최초 여성의병장 윤희순, ‘안사람 의병가’
여성독립운동가 윤희순은 16살에 혼인하여 강원도 춘천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시아버지는 구한말 춘천의병을 이끈 유홍석으로 윤희순은 자연스럽게 시아버지를 따라 의병들의 음식과 의복을 조달 하며 의병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지역 여성 30여 명을 모아 ‘여성의병대’를 조직하고 의병들의 취사와 세탁을 전담하는 것은 물론 군자금을 모아 탄약을 제조하고, 남장을 하고 군사정 보를 수집하고, 군사훈련에도 직접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의병활동을 하였습니다. 1910년 8월 국권이 상실되자 국내 의병 활동이 어렵게 되었고 시아버지와 남편은 중국으로 망명했습니다. 윤희순도 이듬해 이들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특히 중국에서는 ‘노학당’이라는 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운동가들을 양성했습니다. 이후 조선독립단을 설립하고 지원하는 활동을 하였고, 1935 년 75살의 생을 마칠 때까지 40년간의 항일운동을 지속하였습니다.
윤희순은 안사람 의병가 외에도 여러 편의 의병가와 격문을 지었습니다. 일본군과 그들의 앞잡이를 꾸짖는 그녀의 격문은 투박하지만 당당함이 느껴집니다. 그녀는 자신의 글 말미에 항상 자신의 이름 석자를 당당히 적었습니다. “우리 조선의 안사람들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줄 아느냐? 우리 안사람도 의병을 할 것이다……이 마적떼 오랑캐야. 좋은 말로 할 때 용서를 빌고 가거라. 이 오랑캐야. 대장놈들 아. 우리 조선 안사람이 경고한다.” - 조선 선비의 아내 윤희순
여성독립운동가 윤희순의 꿈이 우리의 독립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독립운동가 윤희순이 되어 그녀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주세요!
윤희순의 꿈을 세계 친구들에게 알려주세요! _ kkum.prkorea.com
◎ 정정화 | Jeong Jeong-hwa | 1900~1991
아들아 조국이 무엇인지 모를 때에는 그것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보아라!
‘임시정부의 안주인’이라고 불리는 여성독립운동가 정정화는 자신의 회고록 『장강일기』에서 자신의 독립운동활동을 ‘내가 맡은 일을 했을 뿐이다’ 라고 담담하게 기록했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1920년 중국 으로 망명하여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임시정부 요인들의 살림을 책임지면서 궂은일을 감당하였 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임시정부 요인들을 돌보았습니다.
여성독립운동가 정정화가 임시정부와 인연을 맺은 건 1920년 독립운동을 위해 한 해 먼저 중국으로 망명한 시아버지 김가진과 남편 김의한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면서부터입니다. 이후로 그녀는 김구, 이동녕 등 임시정부 요인들의 식사를 비롯한 살림을 책임졌고, 1945년 해방을 맞을 때까지 임시정부와 함께 했습니다. 남목청 사건으로 총상을 입은 김구를 간호하고, 20여 년 동안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이동녕의 마지막을 지켰습니다. 정정화는 또한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6번이나 국내에 잠입하는 밀사 역할을 했습니다. 1920년 그녀가 처음으로 중국에 건너갔을 때 임시정부의 재정과 활동 상황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이에 정정화는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국내에 다녀올 것을 자원하였고, 이렇게 6번이나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국내에 잠입했습니다. 일제에 발각되면 큰 고초를 겪을 수 있는 위험한 임무였습니다.
정정화는 임시정부가 설립한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중국에서 태어나 조국을 얘기로만 듣고 자라난 아이들, 그 아이들에게 독립된 조국의 꿈을 심어주었습니다. “나는 아들의 손을꼭 움켜쥐었다. 그리고 손끝으로 말해주었다. 조국이 무엇인지 모를 때에는 그것을 위해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보라고. 그러면 조국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고.”- 정정화 『장강일기』 중
여성독립운동가 정정화의 꿈이 우리의 독립을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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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신성 | Jo Sin-seong | 1873~1953
내 나이의 40년을 깎아 20살의 청년이 되어 다시 조국의 일터에 몸을 바치려 한다!
“일거리 많은 조선에 태어난 것은 더 없는 천행이지만 일터에 알맞은 일꾼이 되지 못하니 부끄러울 뿐이다.……다만 내가 부끄럽지 않은 것은 60평생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것을 가려 내가 맡은 공사(公事) 를 저버린 적은 없다. 이것이 나의 신조요, 기운이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내 나이의 40년을 깎아 20당년의 청년으로서 다시금 조선의 일터에 몸을 바치려 한다.” - 여성독립운동가 조신성의 회갑연 답사
1934년 9월 평양의 각계 유지 150여 명이 모여 여성독립운동가 조신성의 회갑연을 열었습니다. 평양 유지들이 회갑연을 개최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여성계 인사로는 조신성이 처음이었습니다. 여성독립운동가 조신성은 1873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출생했습니다.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16살의 어린 나이에 결혼했지만 불행하게도 22살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이런 비극적인 그녀의 인생에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기독교를 믿고 교육을 받게 되면서 조신성이 여성과 민족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된것입니다. 이후 그녀는 24살에 서울에 와서 이화학당과 교원양성소에서 공부하고 소학교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28살부터는 6년 동안 이화학당 사감으로 재직하면서 한국 최초의 조선부인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도산 안창호 등 여러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교류하였습니다. 이러한 인연으로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1910년에는 평양 진명여학교의 교장직을 맡아 활동했습니다.
1920년 11월에는 평안남도 맹산 일대에서 독립투쟁을 벌였던 대한독립청년단(일명 맹산독립단)에서 가담해 활동하던 중 체포되었습니다. 옥고를 치르고 1923년 6월에야 풀려났습니다. 이후 항일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 평양 지회의 회장으로서 여성운동을 이끄는 한편 가난한 아동을 위해 학교를 설립 하고 교육에 매진했습니다. 여성독립운동가 조신성은 한 평생을 이 땅의 여성과 아동의 교육을 위해 헌신하며 흔들림 없는 독립운동의 길을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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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화벽 | Jo Hwa-byeok | 1895~1975
대한 독립 만세! Long live Korean independence!
1919년 3월 개성에서 한 여학생이 가죽 가방을 들고 고향인 양양으로 향했습니다. 그녀는 개성역에서 열차를 타고 원산에 도착한 뒤, 다시 배를 타고 강원도 대포항에 도착했습니다. 대포항에는 일본 경찰 들의 검열과 감시가 삼엄했습니다. 그녀도 소지품을 수색 당하고 심문을 받았지만 무사히 풀려났습 니다. 그리고 다행히 자신의 가죽 가방 안 버선목 솜 사이에 몰래 감춰온 3·1독립선언서도 발각되지 않았습니다.
개성에서 3·1독립선언서를 양양으로 가져와 강원도지역에 3·1만세운동의 불을 지 핀이는 바로 여성독 립운동가 조화벽입니다. 조화벽은 강원도 양양 출신으로 개성 호수돈여학교를 다니며 호수돈 비밀결 사대의 일원으로 활동했습니다. 호수돈 비밀결사대는 교사와 학생들로 구성된 비밀 독립운동 단체였 는데 개성의 3·1만세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일제가 휴교령을 내리자 조화벽은 직접 필사한 3·1독립선 언서를 숨겨서 양양으로 가져왔습니다. 그녀가 목숨 걸고 가져온 독립선언서는 지역 청년들에게 전달 되었고 조화벽은 청년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준비하여 4월 4일 양양 3·1만세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양양 만세운동은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만세운동일뿐만 아니라 그 규모나 격렬함이 전국적으로 손꼽히는 만세운동이었습니다.
조화벽은 신분을 숨기고 피신하였다가 개성 호수돈여학교로 다시 돌아가 학업을 마쳤습니다. 졸업 후에는 공주 영명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는데 그 곳에서 고아가 된 유관순의 두 동생을 돌보며 유관순의 오빠 독립운동가 유우석과 인연이 되어 1925년 혼인을 했습니다. 이후 여러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 면서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전파하였으며, 1932년 고향인 양양으로 돌아와 정명학원을 설립하여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헌신했습니다. 정명학원은 1944년 폐교할 때까지 6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여성독립운동가 조화벽의 꿈이 우리의 독립을 이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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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용신 | Choi Yong-sin | 1909~1935
우리 농촌을 계몽하여 일본제국주의에 맞서자!
최용신은 농촌계몽운동을 통해 일제에 맞섰던 여성독립운동가입니다. 1930년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수탈이 강화되었던 우리 농촌은 무지와 가난으로 황폐했습니다. 최용신은 이러한 우리의 농촌을 계몽하여 발전시키는 것에 나라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했습니다.
1931년 10월 최용신은 YWCA 농촌지도원 자격으로 경기도 안산의 샘골로 갔습니다. 그녀는 제일 먼저 예배당을 빌려 한글을 비롯한 산술, 보건 및 농촌 생활에 필요한 상식과 기술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무허가였던 강습소의 정식 인가를 신청하고 학생들이 늘어나자 교실 증축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즈음 그녀의 활동에 냉소적이고 비판적이었던 마을 사람들은 최용신의 헌신적인 노력에 변화되어 그녀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샘골 주민들은 교실 증축을 위해 스스로 모금활동을 벌이고 토지를 기증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 예배당에 딸린 작은 강습소는 ‘천곡학원’이라는 정식 교육기 관으로 발전했습니다. 최용신은 교육사업 외에도 농촌 발전을 위해 농가 부업, 위생 생활과 환경개선, 저축 장려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샘골이 기반을 잡아갈 즈음 최용신은 일본 유학을 결심합니다. 샘골을 더 발전시키려면 새로운 선진 지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일본 유학 중 갑자기 병을 얻게 되어 학업을 중단하고 샘골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돌아온 최용신은 이전보다 더욱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YWCA의 보조금이 중단되고 학원 운영이 어려워지자 학원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중 과로로 쓰러져 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최용신은 마지막까지 학교와 마을을 걱정했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에는 500여 명의 사람들이 참석해 농촌계몽운동을 통해 일제와 맞섰던 젊은 여성독립운동가를 애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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