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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독립운동가4_외국인 엽서 (2019)
Independence Activists 4: Foreign Supporters Postcards (2019)
한국어
독립운동가4 외국인 엽서세트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함께한 12명의 외국인들을 소개하는 자료다. 1910년부터 35년간 이어진 일제강점기와, 1905년 독도가 강제로 편입된 역사를 배경으로, 국적을 넘어 한국의 독립을 도운 외국인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EnglishThis postcard set from the Independence Activists 4 series introduces 12 foreign supporters who joined Korea's independence movement. Set against the backdrop of the Japanese Occupation Period (Anti-Japanese Resistance Period), which lasted 35 years starting in 1910, and the forced annexation of Dokdo in 1905, it tells the stories of foreign activists who helped Korea's fight for independence, regardless of their nationality.
자료 원고 · 한국어
◎ 독립운동가의 심장 독도 Dokdo, heart of freedom fighters
독도에서 통일까지 100% 완전한 대한민국을 향해 나아가라!
한국인에게 독도는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나라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 치열한 삶을 산 독립운동가의 심장입니다. 5천 년 역사를 꿋꿋하게 지켜온 한국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제국주의의 강제 식민 지가 된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도는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침략의 첫 번째 희생물 이었습니다. 1904년 2월 8일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켜 한국을 군사 점령했으며, 한국에 대한 식민 통치를 시작하기 5년 전인 1905년에 한국 영토인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시켰고 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침탈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는 독도를 강제로 빼앗아간 것처럼, 일본 통치에 저항하는 한국 사람들의 독립 의지를 꺾기 위해 독립운동가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고문하며 생명을 빼앗았습니다. 하지만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한국인들의 심장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한국인들은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전개 했으며, 1919년 3월 1일에는 무려 200만이 넘는 한국인들이 한반도 곳곳에서 독립운동가가 되어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습니다.
21세기 현재, 일본 제국주의 침략 시계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정부가 일본 초 · 중 · 고교 교과서에 한국이 독도를 불법적으로 빼앗았다고 서술하며 독도에 대한 왜곡된 역사 의식을 전 세계에 홍보하고 있습니다. 독도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역사 인식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독도는 한국인 들에게 반성하지 않는 일본 제국주의 역사 인식을 심판하여 인류 보편적인 정의와 평화를 수호하려는 21세기 독립운동가로서 사명을 되새기게 합니다.
한국의 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의 청년들은 21세기 독립운동가가 되어 부활하는 일본 제국주의를 막아내고 독립운동가가 꿈꾼 하나된 나라, 통일 한국을 성취하고자 합니다.
“독도에서 통일까지 100% 완전한 대한민국을 향해 나아가라!”
◎ 한국독립운동에 함께한 외국인 독립 영웅들
그들이 꿈꾼 대한민국을 기억하라! Remember the Korea they dreamed of!
여러분은 100년전 한국의 독립운동에 함께한 외국인 독립 영웅들을 알고 있나요?
가네코 후미코(일본), 두군혜(중국), 루이 마랭(프랑스), 앨버트 와일더 테일러(미국), 윌리엄 알더만 린튼(미국), 장개석(타이완), 저보성(중국), 조지 루이스 쇼(영국), 조지 애쉬모어 피치(미국), 프레드릭 아서 맥켄지(캐나다), 플로이드 윌리엄 톰킨스(미국), 호머 베절릴 헐버트(미국) 12명의 외국인 독립운 동가들을 소개합니다.
100년전 모든 나라가 ‘평등’과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고귀한 신념 아래 미국, 영국, 중국, 캐나다 심지어 일본의 사람들까지 한국의 독립운동에 함께했습니다.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는 독립운동가 박열과 함께 항일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일제의 감옥에서 서거하였으며, 중국인 두군혜(두쥔훼이)는 독립운 동가 김성숙과 함께 한국과 중국의 항일운동에 공동 참여했습니다. 프랑스 정치가 루이 마랭은 파리 에서 ‘한국친우회’를 창립하고 한국독립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을 제안하였으며, 미국인 사업가 앨버트 와일더 테일러는 최초로 3·1운동을 외신에 보도하여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렸습니 다. 그리고 한국인 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사람으로 불리는 미국인 호머 베절릴 헐버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도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유언을 남기며 한국땅에 잠들었습니다.
100년전 한국독립운동가들은 외국인 독립운동가들과 하나의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의 독립을 이루었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 청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꿈을 꾸고 있나요? 여러분의 꿈은 세계인들과 함께하고 있나요? 100년전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한국의 독립운동에 함께한 외국인 독립 영웅들을 기억해주세요! 그리고 이제 대한민국 청년 여러분이 21세기 독립운동가가 되어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 주세요!
독립운동가의 꿈을 세계 친구들에게 알려 주세요! _ kkum.prkorea.com
◎ 일본 | 가네코 후미코, Kaneko Fumiko, 金子文子, 한국명 박문자| 1903-1926 | 사회활동가
조선에 바친 조선민족으로서 선택한 길이다. I chose to give my life for the independence of Joseon.
경상북도 문경에는 독립운동가 박열의사기념관이 있습니다. 기념관이 있는 공원에는 무덤이 하나 있는데, 이는 박열의 무덤이 아닙니다. 박열의 동지이자 아내였던 일본여성 가네코 후미코의 무덤입니 다. 후미코는 어떻게 일본여성으로서 조선인의 아내가 되어 한국땅에 묻히게 되었을까요?
가네코 후미코는 1903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났으나 불우한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부모가 후미 코의 양육을 거부하여 그녀는 출생신고도 하지 않은 채 친척집에 맡겨졌습니다. 9살이 되던 1912년에는 충청북도 청원에 살고 있는 고모의 양녀가 되어 조선에서 7년동안 생활했으나, 이 기간도 하녀와 같은 학대 받는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때의 조선에서의 생활은 후에 박열을 비롯한 한국독립운동가 들을 만나 함께 활동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선에 있는 동안 그녀는 일제에 핍박 받는 한국 인에게 동정심을 느꼈고, 1919년 3·1운동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한국인에게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1919년 일본으로 돌아온 후미코는 이듬해 도쿄로 갔습니다. 그녀는 신문팔이, 행상, 식모살이, 식당 종업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공부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때 그녀는 사회주의자, 아나키스 트들과 교류하며 여러 사상에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1922년 한국의 독립운동가 박열을 만나 함께하기 시작했습니다. 후미코는 박열과 무정부주의자 단체인 ‘흑우회’를 결성하고, 잡지를 발간하고, 항일 단체인 ‘불령사 ’를 조직했습니다. 그런데 1923년 가을 일본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박열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불령사가 일왕 암살을 계획한 것으로 날조했고, 1926년 3월 박열과 후미 코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녀는 곧바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4개월 뒤 감옥에서 사망했습 니다. 감옥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을 때 그녀는 일왕의 은사장을 찢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조선에 바친 조선민족으로서 선택한 길인데 몸과 마음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간 무기징역의 일본감옥 속에서 더 살아보았자 그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일본인으로서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함께한 가네코 후미코는 우리의 위대한 영웅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독립운동가 가네코 후미코가 되어 그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 주세요!
가네코 후미코의 꿈을 세계 친구들에게 알려 주세요! _ kkum.prkorea.com
◎ 중국 | 두쥔훼이, Du Junhui, 두쥔훼이, 杜君慧 | 1904-1981 | 항일운동가, 작가
나는 조선의 딸입니다. I am a daughter of Joseon.
“나는 늘 조선 부녀들의 일을 나의 일로 생각하고, 어떻게 해야 우리 조선 부녀 동포들이 전 민족의 해방을 위해 공헌할 수 있을 것인가 늘 생각하고 있다”-1945년 7월 <독립>잡지 기고문 중
중국인 여성 두쥔훼이는 광복을 눈앞에 둔 1945년 7월 미주에서 발행되는 잡지 <독립>에 자신을 ‘조선의 딸’로 자처하며 조선부녀들의 독립운동활동과 지원을 촉구하는 기고문을 실었습니다. 중국인 여성으로서 두쥔훼이는 어떻게 자신을 ‘조선의 딸’로 여기고, 한국의 독립운동에 함께하게 되었을까요?
두쥔훼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독립운동가 김성숙의 아내입니다. 그녀는 중국의 항일 독립운동가이며, 중국의 여성엘리트운동을 이끈 혁명가이기도 합니다. 두쥔훼이는 자신의 고향인 중국 광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중 김성숙을 만났고, 1929년 상해에서 결혼을 했습니다. 이후로 두쥔훼이와 김성숙 부부는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함께 항일운동에 나섰습니다. 1935년 12월 12일 부부는 중국좌익작가연맹 및 문화계 인사들과 함께 『상해문화계구국운동선언』을 발표하고 함께 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김성숙은 두쥔훼이가 활동하고 있던 상해여성구국회에 가입해 중국 여성계의 항일구국운 동에도 참여했습니다. 또한 두쥔훼이와 김성숙은 1942년 10월에 중국 중경에서 설립된 한중문화협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43년 2월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부원으로 활동하였고, 1945년에는 한국구제총회 이사를 지냈습니다. 중국인 항일운동가로서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함께한 두쥔훼이는 우리의 위대한 영웅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독립운동가 두쥔훼이가 되어 그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 주세요!
두쥔훼이의 꿈을 세계 친구들에게 알려 주세요! _ kkum.prkorea.com
◎ 프랑스 | 루이 마랭, Louis Marin | 1871~1960 | 정치가
한국 독립을 위해 100만인 서명운동을 펼치자!
1921년 6월 프랑스 파리에서 ‘한국친우회’가 창립되었습니다. 친우회 창립총회에는 프랑스 상하원의원 9명, 인권연맹 회장, 소르본대학교 교수, 언론인 등 프랑스의 저명한 인사들이 회원으로 참석했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한국친우회에 참여하게 되었을까요? 이들 대부분은 루이 마랭 의원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친우회 회장인 마랭은 창립총회에서 “한국 독립을 위해 100만인 서명운동을 펼치자” 고 제안했습니다.
프랑스의 저명한 정치가 루이 마랭은 1901년 러시아와 중국을 거쳐 한국을 여행했습니다. “한국은 극동의 프랑스이며, 한국민은 순수하고 친절하다” 라고 자신의 여행기에 감상평을 남겼으며, 귀국 후에도 한국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 대한제국관련 논문을 7편이나 발표했습니다. 1905년 하원의 원에 선출된 루이 마랭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해 한국을 적극적으로 돕기 시작했습니다. 일본과 독일의 침략과 식민지배를 규탄하는 의회보고서를 11차례나 작성하였고, 3·1운동이 일어나자 의회에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인권운동가 펠리시앙 로베르 샬레(Felicien Robert Challaye)를 한국에 파견했습니다. 샬레는 서울 등지에 두 달 남짓 머물면서 3·1운동을 탄압하는 일제를 고발했습니 다. “일본 군경은 해를 끼치지 않는 군중을 향해 마구 총질을 하고 수많은 평화적인 한국인들을 죽였 다……일본의 친구였던 내가 이제부터 일본제국주의를 고발하고자 한다.”
또한 마랭은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파리위원회를 설치하자 위원회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으 며, 1932년 윤봉길의사 의거 후 일제가 프랑스 조계지에서 한국인들을 대거 체포하자 이를 막기 위해 프랑스 외교채널에 여러 차례 강력한 서한을 보냈습니다. 프랑스 정치인으로서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함께한 루이 마랭은 우리의 위대한 영웅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독립운동가 루이 마랭이 되어 그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 주세요!
루이 마랭의 꿈을 세계 친구들에게 알려 주세요! _ kkum.prkorea.com
◎ 미국 | 앨버트 와일더 테일러, Albert Wilder Tayler | 1875-1948 | 사업가, 언론인
내가 사랑하는 땅 한국, 아버지의 묘소 옆에 나를 묻어 주시오.
대한민국 서울 종로구 사직로에는 오래된 2층짜리 붉은 벽돌 저택이 있습니다. 이 저택은 영국과 미국의 주택 양식이 혼합되어 있으며, 벽돌을 쌓은 방식이 매우 독특하여 건축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건물 입니다. 이 집의 머릿돌에는 ‘DILKUSHA(딜쿠샤) 1923’라고 새겨져 있었지만 오랫동안 이 집의 연원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 한 미국인이 한국에 거주했던 부모님의 집을 추적하면서 이 저택의 주인이 밝혀졌습니다.
힌디어로 ‘이상향, 기쁨’을 뜻하는 딜쿠샤의 주인은 미국인 사업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앨버트 와일더 테일러였습니다. 테일러는 1897년 아버지의 금광사업을 돕기 위해 한국에 처음으로 들어와, 1917년 영국인 연극배우인 메리 테일러와 결혼하여 한국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테일러 부부는 1923 년에 착공된 딜쿠샤에서 1945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기 전까지 살았습니다. 딜쿠샤가 더 의미 있는 것은 집주인 테일러가 3·1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1919년 2월 28일 테일러의 부인 메리가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때 테일러는 아들의 침대 밑에 숨겨진 3·1독립선언서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를 몰래 일본으로 보내어 미국으로 타전하였고, 이로써 3·1운동 소식이 처음으로 외신에 보도되었습니다. 이후로도 테일러는 제암리 학살 사건을 취재하고, 조선총독을 항의방문하는 등 한국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습니다. 1941년 12 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테일러는 일제에 의해 감금되었고, 메리 역시 가택연금 되었습니다. 이들은 이듬해 조선총독부의 외국인 추방령에 따라 한국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광복 후 테일러는 한국으로 돌아오기 원했지만 미국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고, 자신의 유언에 따라 한국에 안장되었습니다. 미국인으로서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함께한 앨버트 와일더 테일러는 우리의 위대한 영웅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독립운동가 앨버트 와일더 테일러가 되어 그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 주세요!
앨버트 와일더 테일러의 꿈을 세계 친구들에게 알려 주세요! _ kkum.prkorea.com
◎ 미국 | 윌리엄 앨더만 린튼, William Alderman Linton, 한국명 인돈 | 1891~1960 | 선교사, 교육가
대한 독립 만세! Long live Korean independence!
“3월 1일 전국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한 인파가 쏟아져 나왔다. 폭력이나 무질서는 없었다. 일본 정부가 이 봉기를 억누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참가자들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감옥은 한국인들로 차고 넘쳤다. 어린이도, 노인도, 양반도, 종도, 그야말로 모든 사람이 있었다. 수천 명의 항일운동가들이 총검에 짓밟혔으나 누구도 (폭력적) 저항을 하지 않았다 .”
1919년 5월 미국 애틀랜타 지역 신문 ‘애틀랜타 저널’에 일제 치하의 한국 상황과 3·1운동의 실상을 알리는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한 애틀랜타인의 증언(Atlantian tells how Koreans are seeking liberty)’ 이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 기사는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 앨더만 린튼이 기고한 것으로 그는 기사를 통해 한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도움을 간절히 호소했습니다.
린튼은 1891년 2월 미국 조지아 주 토머스빌에서 태어나 조지아 공대를 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그러나 안정된 미래가 보장되는 미국에서의 삶을 거부하고, 1912년 22살의 나이에 선교사로 한국을 찾았 습니다. 그는 군산 영명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1917년 영명학교 교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19 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군산의 만세시위를 지도했습니다. 군산 만세운동은 서울의 3·1운동 후 한강 이남에서 일어난 첫번째 만세시위였습니다. 그리고 린튼은 그해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남장로교 평신 도대회에 참석해 3·1운동의 실상을 보고하였고, 애틀랜타 신문에 기고를 하여 비폭력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일제의 만행을 폭로했습니다.
이후 린튼은 전주 신흥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중 일제의 강제적인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학교를 폐교 하였고, 1940년에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어 한국을 떠났습니다. 광복 후 린튼은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는 학교를 세웠고, 한국전쟁 중에도 한국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는 대학을 세우는 등 자신의 생을 마칠 때까지 한국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미국인으로서 일본제국주 의에 맞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함께한 윌리엄 앨더만 린튼은 우리의 위대한 영웅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독립운동가 윌리엄 앨더만 린튼이 되어 그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 주세요!
윌리엄 앨더만 린튼의 꿈을 세계 친구들에게 알려 주세요! _ kkum.prkorea.com
◎ 타이완 | 장개석, Chiang Kai-shek, 장제스, 蔣介石| 1887-1975 | 정치가
중국 100만 군인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 청년 한 명이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
1943년 7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 영국, 중국 3대 연합국이 모여 제2차 세계 대전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는 회담이 개최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에 임시정부 지도자 김구는 즉각 중국의 지도자 장개석을 만나 카이로회담에서 중국이 한국의 독립을 주장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1943년 11월 미국, 영국, 중국의 3대 연합국 대표가 이집트 카이로에 모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장개석은 연합국이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도록 주장하였고, 그 결과 12월 1일 『카이로 선언』에는 한국의 독립을 확인하는 내용이 담기게 되었습니다. 카이로 선언은 한국독립운동역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선언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국제사회가 한국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확인해준 첫 번째 선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장개석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1932년 4월 윤봉길의사의 상해 의거 때문이 었습니다. 그는 윤봉길의사의 의거 소식을 듣고 ‘중국 100만 군인도 하지 못한 일을 조선 청년 한 명이 했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극찬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임시정부 지도자 김구를 만났고 1945년 한국이 광복을 맞을 때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였습니다. 장개석은 임시정부가 일제의 핍박을 피해 중국의 여러 지역으로 거처를 옮길 때마다 각 지역에 임시정부에 협조하고 지원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으며, 1940년 9월 임시정부가 중경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할 때에도 큰 지원을 하였고, 중국군관학교에 한인반을 설치하여 군사를 양성하도록 돕고, 여러 차례 거액의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 하였습니다. 중국의 정치가로서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함께한 장개석은 우리의 위대한 영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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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 저보성, Chu Fucheng, 주푸청, 褚輔成 | 1873~1948 | 항일운동가
대한 독립 만세! Long live Korean independence!
아름다운 호수 ‘남호’가 흐르는 중국 남동부 절강성의 소도시 자싱 메이완제 76호에 가면, 남호 호숫가에 자리잡은 잘 보존된 2층짜리 목조 가옥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집 주변에서는 뜻 밖에도 한국독립운동가 ‘김구 피난처’라는 안내판을 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자 김구는 어떻게이 곳과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요?
1932년 4월 윤봉길의사가 중국 상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 의거를 일으키자, 일제는 한국독립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의거를 계획한 임시정부 지도자 김구에게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추적에 나섰습니다. 김구는 일제의 추적을 피해 미국인 선교사 피치의 집에 숨어있다가 피치 목사 부부의 도움으로 상하이를 탈출했습니다. 그리고 중국 남동부 저장성 자싱으로 향했습니다. 중국의 항일운동가 저보성이 자신의 고향인 자싱에 김구의 피난처를 제공했기 때문입 니다.
저보성은 자싱 출신의 명망가로 상당한 재력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자싱에 있는 자신의 수양 아들집 2층 다락방을 김구의 은신처로 정하고 집을 개조했습니다. 2층 김구의 방에서 주변을 잘 살펴볼 수 있도록 작은 창을 여러 개 두었고, 한 쪽 마룻바닥에는 네모난 구멍을 뚫어 비상구를 마련했습니다. 이 비상구는 평소에는 나무판자로 덮어두었다가 위급상황에는 이 통로를 이용해 빠르게 탈출하여 집 뒤편에 있는 배를 타고 벗어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일경의 추적이 자싱 시내에 까지 좁혀 오자 그는 하이옌에 있는 며느리 집안의 별장으로 김구를 피신 시켰습니다. 저보성은 김구의 피신을 위해 자신 뿐만 아니라 아들, 며느리 등 자신의 온 가족을 동원했습니다. 그리고 이동녕, 김의한, 박찬익, 엄항섭 등 임시정부의 주요 인사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까지 피난처를 제공했습니다. 중국인으로서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함께한 저보성은 우리의 위대한 영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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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 조지 루이스 쇼, George Lewis Shaw | 1880-1943 | 사업가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상해에서 안동현까지는 이륭양행(怡隆洋行) 배편을 이용하였다. 이것은 아버님과 남편이 상해에 갔을 때도 이용했던 선편으로 임시정부와 국내를 잇는 주요 통로의 하나였다” - 정정화 『장강일기』 중에서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책임졌고 독립운동자금을 모으기 위해 6번이나 국내에 잠입했던 여성독립운동가 정정화는 중국 안동(지금의 단동)에서 ‘이륭양행’의 배를 타고 상해에 도착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합류했습니다. 당시 정정화를 비롯한 한국독립운동가들에게 배편을 제공한 이륭양행은 어떤 회사였 을까요? 뜻밖에도 이륭양행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회사가 아닌, 아일랜드계 영국인 조지 루이스 쇼가 중국 안동에서 운영하던 무역회사였습니다. 그리고 쇼는 단순히 독립운동가들에게 배편을 제공한 것이 아니라 이륭양행 2층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사무국을 설치하도록 하였고, 교통사무국의 모든 활동을 지원했습니다. 당시 안동의 교통사무국은 임시정부의 자금모집, 국내의 정보수집과 보고, 임시정부의 지령 전달, 독립운동에 참여할 인물 소개와 연락, 무기조달 등 다양한 활동을 했습니다.
일제는 한국의 독립운동을 돕는 쇼가 눈엣가시 같았습니다. 그래서 기회를 엿보던 중 1920년 7월 자신의 부인과 자녀를 맞으러 신의주에 온 쇼를 체포했습니다. 이 사건은 영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커다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중국 내 영자신문과 런던 타임즈 등에 기사화 되면서 반일감정이 확산되 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입어 쇼는 4개월 후에 석방되었습니다. 석방 뒤에 일제의 감시와 탄압은 더욱 강화되었지만 쇼는 여전히 한국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했습니다. 영국인으로서 일본제국주 의에 맞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함께한 조지 루이스 쇼는 우리의 위대한 영웅입니다.
“지금 세계의 대세를 보라.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인도의 독립 역시 가까이에 존재한다. 다음에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함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대들이 만족할 만한 일은 멀지 않았다” -쇼가 독립운동가 김문규에게 한 말
이제 여러분이 21세기 독립운동가 조지 루이스 쇼가 되어 그가 꿈꾸었던 대한민국을 완성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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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 조지 애쉬모어 피치, George Ashmore Fitch | 1883~1979 | 선교사
대한 독립 만세! Long live Korean independence!
“(피치)부인은 자기네 자동차에 나와 부부인 양 나란히 앉고 피치 선생은 운전사가 되어 뜰 내에서 차를 몰고 문 밖으로 나갔다” 1932년 5월 김구의 백범일지에는 삼엄한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변장을 하고 피치의 집을 떠나는 독립운동가 김구의 긴박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큰 위험을 무릅쓰고 일제의 감시를 피해 독립운동가 김구를 숨겨주고 탈출까지 도운 이 ‘피치’선생은 누구일까요?
조지 애쉬모어 피치는 중국에 파견된 미국인 선교사였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1909 년에 중국 상해로 왔습니다. 그는 상해에서 망명한 한국인들과 교류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인들을 돕게 되었습니다. 1932년 4월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는 피치가 한국독립운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윤봉길의사의 의거 직후 일제는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임시정부 지도자 김구와 요인들은 피신을 위해 피치의 집으로 찾아갔습니 다. 피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숨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일경의 추격이 자신의 집으로까지 좁혀오자, 아내 제랄딘과 함께 김구를 탈출시켰습니다. 그는 또한 윤봉길의사 의거 직후 안창호가 프랑스 조계지에서 체포되자, 프랑스계 언론사에 서한을 보내고 석방운동에 나섰습니 다. 1937년 일본군이 중국 난징에서 대규모 학살을 저질렀을 때에는 난징에 있던 외국인들과 함께 일본군의 학살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고 국제사회에 일본군의 만행을 폭로하며 일본제국주의에 정면으로 맞서 싸웠습니다.
피치의 독립운동이 더욱 의미 있는 것은 그의 아버지 조지 필드 피치(George Field Fitch) 목사 역시 한국독립운동을 도운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2대에 걸쳐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함께한 조지 애쉬모어 피치는 우리의 위대한 영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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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나다 | 프레드릭 아서 맥켄지, Frederick Arthur McKenzie | 1869~1931 | 언론인
나는 지금 ‘자유’와 ‘정의’를 외치고 있다. 세계는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가?
프레드릭 아서 맥켄지는 1904년 런던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아시아 특파원으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이후 잠시 귀국하였다가 1906~1907년에 다시 한국을 찾아 멸망해 가는 한국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는 특히 1907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무명의 의병들을 직접 만나 취재했습니다. 맥켄지는 이때의 경험을 『대한제국의 비극 (Tragedy Of Korea)』 이라는 책으로 출간하였는데, 그의 책은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또한 1919년 3·1 운동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해 4월 일제가 3·1운동의 보복으로 ‘제암리 학살 사건’을 일으키자,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의 증언을 토대로 그 진상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간 맥켄지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1920년에 『한국의 독립운동(Korea’s Fight for Freedom)』 을 출간하여 일제의 만행과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렸습니다. 이후 맥켄지는 1920년 영국 에서 한국친우회를 조직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계속 지원했습니다.
맥켄지가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일본에 호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취재를 통해 한국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일제의 만행과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한국인들을 목격하고 그의 생각이 바뀌 었습니다. 그리고 언론인으로서 자신이 발견한 진실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언론인 으로서 자유와 정의를 위해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운 프레드릭 아서 맥켄지는 우리의 위대한 영웅입니다. “이 책에서 나는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한 고대 민족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비극적인 공포 속에서 살다가 오랜 잠에서 어렴풋이 깨어난 한 몽고계 민족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문명에 있어서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들, 이를테면 자유, 자유로운 신앙, 그들의 여성의 명예, 그리고 그들 자신의 영혼의 계발과 같은 것들을 누린 적이 있으며 지금도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나는 지금 ‘자유’와 ‘정의’를 외치고 있다. 세계는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가?”-『한국의 독립운동』 서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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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 플로이드 윌리엄 톰킨스, Floyd Williams Tomkins | 1850-1932 | 목사
나는 평등한 권리와 자유의 가치가 모든 나라에 보장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대한독립만세!” 1919년 4월 미국 필라델피아 거리에 만세 소리가 퍼졌습니다. 1919년 3·1운동 소식이 국외로 전달되자, 미국 각지의 한인동포 150명은 미국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에 모여 <제1차 한인회의 >를 개최했습니다. 이들은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의지를 알리는 5개의 결의안을 채택하고 독립선언문을 낭독했습니다. 미국인 플로이드 윌리엄 톰킨스 목사는 이 회의에 초청되어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같은 해 5월 미국인을 중심으로 한국친우회(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 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을 맡으며 한국독립운동 지원에 적극 나섰습니다.
“일본 정부는 강압적이고 잔인한 방식으로 대한의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고 있다. 한국친우회는 미국이 주장하는 평등한 권리와 자유의 가치가 약소국에도 보장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이유다.” -1919 한국친우회
한국친우회 결성에 함께 나섰던 서재필은 톰킨스 목사를 ‘조선의 독립을 위해 무장된 군인 몇 개 연대 와도 맞먹는 인물’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후 톰킨스 목사는 1920년 5월 필라델피아에서 대규모 행사를 개최하여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한국문제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해 미국 대통령과 상원에 보냈으 며, 1921년 11월에는 워싱턴회의에서 한국문제를 다뤄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제출하였고, 필라델 피아에서 대중집회를 열어 한국문제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해 미국무장관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1923년 9월 일본에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한국인들이 무자비하게 학살당하자, 미국무장관에게 증거자 료와 함께 항의서를 제출했습니다. 미국인으로서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함께한 플로이드 윌리엄 톰킨스는 우리의 위대한 영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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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 호머 베절릴 헐버트, Homer Bezaleel Hulbert | 1863~1949 | 선교사, 교육가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합니다.
1907년 6월 이준, 이상설, 이위종은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제2회 세계평화회의가 개최되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이들보다 먼저 헤이그에 도착한 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호머 베절릴 헐버트입니다. 헐버트는 세계평화회의 개최사실을 미리 알고 내한하여 고종에게 알리고 특사파견을 권유했습니다. 그리고 특사단이 헤이그에 도착하자 그는 특사단과 함께 한국의 처지를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여러 노력을 다하였지만, 일본의 방해로 평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여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헐버트는 1886년 7월 조선왕조의 요청으로 육영공원 교사로 한국에 처음 왔습니다. 육영공원은 양반과 고위 관료 자제들에게 근대교육을 실시한 한국 최초의 근대식 공립 교육기관이었습니다. 헐버트는이 시기에 순한글로 된 세계지리서인 『사민필지』를 편찬하였는데, 이 책은 당시 중국과 일본 정도만을 인식하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1893년 9월 헐버트는 감리교 선교사로서 두번째로 한국에 왔습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문서선교활동을 하며 한국의 문화와 역사 등에 관한 100여 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은 당시 한국의 유일한 영문 잡지였던 The Korean Repository와 The Korea Review에 발표되어 세계에 한국을 알리는 자료가 되었습니다.
이후 그는 고종을 도우며 한국의 정치문제에 관여하게 되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미국 워싱턴에 알리는 밀사 활동, 헤이그 특사 활동 등에 참여했습니다. 미국에 돌아간 뒤에도 헐버트는 순회강연 등을 통해 한국의 입장을 꾸준히 알려 나갔습니다. 미국인으로서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함께한 호머 베절릴 헐버트는 우리의 위대한 영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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